우리는 대부분 피라미드를 직접 볼 수가 없다. 거리도 멀고 이집트 여행이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부분 피라미드를 수많이 접하게 된다. 외국의 다큐멘타리는 물론이고 여행정보프로그램이나 영화 심지어는 애니메이션등의 단골소재로도 피라미드는 빠지지 않는다. 그처럼 신비롭고 그처럼 웅장한 건물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현재 두바이에서는 700m가 넘는 건물이 우리 기술에 의해 건설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피라미드만큼 매력적인 건물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 중에서도 쿠푸왕(기원전, 2551~2528년)의 피라미드는 가장 거대하면서도 가장 많은 미스테리를 품고 있는 건축물이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을까? 왜 그렇게 만든 것이고 거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그 단순한 사면체의 구조물은 수많은 의문을 우리에게 품게 만들었다. 현재에도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있긴 하지만, 비교적 밝혀졌다고 인정되는 부분만 간략하게 살펴 보자.
우선 피라미드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만들기 이전부터 측량학이라던가 기하학이 상당히 발전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에 따라 농토의 구분선이 훼손되기 일수인데, 이것을 해결하고 나아가 치수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측량학이라던가 기하학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이집트문명보다 발전된 건축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기원전 2600년을 전후하여 유입된 것도 피라미드 축조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피라미드가 처음부터 삼각 뿔 모양은 아니어서, 최초의 피라미드 축조시기인 조세르 왕 (Zeser, 2650년경) 시대에는 계단식 이었다.
그리고 스네푸르 왕(Snefru, 2590년경)은, 좀더 완벽한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여러차례 시행착오를 반복한다. 그 결과 처음에는 경사각이 뒤틀린 굴절 피라미드(184m×184m×105m)가 나왔고, 그 다음엔 좀 더 안정된 모양의 기단식 피라미드로 발전하였고 마지막에 가서야 경사각 51도 내외의 삼각뿔 모양의 피라미드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왜 하필 경사각이 51~52도 일까? 여기에 대해서 서울 광신고 교사출신인 김흥규씨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모래실험을 통해 추측해 보면. 잘 마른 모래를 탁자 위에 조금씩 흘려 모래산을 만들 경우 모래가 가장 높이 쌓였을 때 이 모래산의 경사각을 계산하면 약 51도 남짓이다 .
이 경사각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각이다. 따라서 피라미드의 설계자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각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그림2)
서울 광신고 교사출신인 김흥규씨 주장
또 쿠푸왕의 피라미드 밑면의 둘레를 합친다음 길이의 반을 그피라미드 높이로 나누면. 파이값인 3.14가 나온다
둘레 길이의 합 921.44m x ½ /146.6 = 3.1427이다.
오랫동안 이 파이값은 우연의 일치일꺼라는 회의론적 시각에서 부터, 외계인이 알려주었다는 근거없는 주장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흥규씨 주장에 의하면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1. 바퀴 둘레를 줄로 묶는다. 반드시 바퀴가 아니더라도 원형물체면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2. 줄을 풀어 그 길이를 잰다. 3. 줄이 길이에서 바퀴 혹은 원형 물체의 지름을 나누면 3.14가 된다.
일반적으로 원형모양은 그 크기에 관계없이 원둘레에 대한 지름의 비가 항상 일정하다.이 일정한 비율을 보통 원주율이라 부르고 π로 나타낸다.
따라서 쿠푸왕의 피라미드 경우 3.14라는 파이값을 분명히 알고 의도적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왜 이렇게 파이값은 거대한 건축 구조물 속에 교묘하게 적용하였는지는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쿠프왕의 피라미드는 2,352,000개에서 268만 여개 정도의 각 2.5t 내지 10t 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석회암은 모깔담과 기자 남동쪽 15km 지점의 엘뚜르 등에서 캐내어 이용하였다. 화강암의 경우는 카이로 남쪽에서 무려 850km 떨어진 아스완에서 나일강을 통하여 운반 해 왔다.
돌을 쌓은 단층의 수는 원래 210계단 이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것은 203계단이다. 하루 10만여명이 1년에 3,4 개월씩 20여년(총 2천여일) 동안, 연인원 2~3억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이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50년간 통치한 쿠프왕은 모든 신전을 폐쇄하고 제사를 금지시키고 자기만을 숭배토록 했다.
돌들의 무게를 합치면 684만 8,000톤으로 만약 적재량 7톤짜리 화물로 운반하면 97만 8,286량의 화물차가 필요한데 이 화물차들을 연결해보면 그 길이는 6,200킬로미터에 이른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건설사업은 돌을 캐네어 뗏목으로 운반하고 공사를 하기 위한 도로를 만들고 피라미드의 지하공사를 하는데만 적어도 10만명의 노예가 석 달씩 교대로 해서 10년이 걸렸고 돌을 높게 쌓아 올리는데도 2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아무튼 쿠푸왕은 20년에 걸친 대 공정 끝에 남쪽 변의 길이가 230.45m, 동쪽 변의 길이가 230.39m, 서쪽 변의 길이가 230.36m, 북쪽 변의 길이가 230.24m이고 높이는 146.60m(현재는 약 137m) 경사각 51도 52분(1도는 60분)의 전무후무한 초대형 피라미드를 완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 피라미드가 위치하는 곳은 그리니치로부터 경도 31°인 수직선과 북위 30°인 수평선이 만나는 지점으로, 지구 대륙의 넓이를 4등분하는 점이다. 피라미드의 위치에는 세계의 중심에 피라미드를 세우겠다는 이집트인의 의지가 담겨 있다.
* 피라미드에 대한 여러 기사를 둘러 보던 중 홍익대 수학과 박경미교수는또 하나의 흥미로운 내용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인문계 출신이라 이 분의 소개한 내용을 이해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고, 솔직히 완전히 이해 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이해 한 부분만 소개하기로 합니다.
피라미드의 존재를 신비화하는 다양한 해석을 접하다 보면 혹시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치밀한 계획 없이 피라미드를 세웠는데, 후손들이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보고는 피라미드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쿠푸왕의 피라미드에 담긴 수학적 해석을 보면 꿈보다 해몽이 아니라 실제 꿈 자체가 대단했을 것이라고 인정하게 된다.
피라미드는 밑면이 정사각형이고 옆면에 네 개의 삼각형이 모이는 사각뿔 모양이다. 피라미드의 수치는 로얄큐빗(royal cubit)이라는 단위로 표시되어 있는데, 1로얄큐빗을 현재의 미터법으로 고치면 약 0.524미터이다.
피라미드 밑면이 길이가 원주율과 관련이 있는 것에 관해서는 피라미드에 지구를 담아내고자 하는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피라미드의 밑면의 둘레를 지구의 둘레로, 피라미드의 높이를 지구의 반지름으로 생각하면 그 비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피라미드에는 원주율 π 뿐 아니라 황금비도 들어 있다. 피라미드의 옆면을 이루는 삼각형의 높이는 356로얄큐빗이고, 밑면인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의 반은 220로얄큐빗으로, 그 비를 구하면 약 1.618이 된다. 이는 바로 인류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황금비율이라는 주장이다.
이상은 홍익대 수학과 교수인 박경미씨가 소개한 내용이다. 그렇게 본다면 고대 이집트 인은 단순히 거대한 구조물이 아닌 가장 아름답게 보여 질 수 있는 거대한 구조물을 철저한 계산과 사전준비작업 끝에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위대한 구조물이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쿠푸왕의 강력한 추진 의지와, 뛰어난 역량을 가진 신관들 수학자들 석공들 그리고 엄청나게 고된 작업에도 자율의지로 참여한 일반백성들이 함께 만들어낸 걸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자. 쿠푸왕은 과연 수많은 이집트 인들을 희생시켜 쓸모없는 거대한 돌산을 만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피라미드 축조로 인하여, 고대 이집트는 건축기술과 측량기술등에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그것은 3천년 고대 이집트 왕국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 현재 지구상의 그 어떤 왕조도 3천년의 번영을 누린 나라는 없다. 먼 후일의 축복과 영광을 의해서는 때로는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다.
더구나 20년이라는 대 공정기간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자율의지에 의해서 참여하였고, 고대시대에의 관념으로 볼 때는 예외적으로 기초적인 숙식과 의복을 제공받았으며, 공사기간 역시 강의 범람과 함께 시작되는 농한기로 제한하였다. 이후 근대가 오기까지 4000여년 동안 , 전 세계 국가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된 대부분의 인력이 스스로 의복과 음식 그리고 건강문제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되었음을 감안해 볼 때, 이보다 더 합리적인 대공사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의 심장부로 가는 길 -
고대 이집트에서 피라미드가 가장 집중적으로 만들어 진 것은 제 4왕조(B.C. 2600 ~ B.C.2480)였는데, 오늘날 남아있는 피라미드 중 80%이상은 모두 이당시 축조된 것이다. 또 100m 가 넘는 초 대형 피라미드 역시 오직 제 4왕조시기에만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완공 당시 147m에 이르는 역사상 최대의 피라미드였다. 그러나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살펴 보다 보면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보아도 종이한장 들어갈 곳 없어 보이는 거대한 피라미드 외벽에 뚤려 있는 통로이다.
과연 그 통로는 어디로 통하는 것일까? 우선 겉면에 드러난 구멍은 당시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쿠푸왕은 무덤내부까지 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는 돌로 막았기 때문에, 어느곳이 입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 덕분에 이 엄청난 구조물은 그 내부에 상상을 초월하는 쿠프왕의 막대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3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굴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 왕국이 막을 내린지 약 1천년후인 818년, 이슬람 세력이 북부아프리카 까지 진출하게 되면서, 이집트의 회교왕 알 마문은 쿠프왕의 막대한 보물을 찾아 북쪽 사면밑을 파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정확히 왜 그가 북쪽을 택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북쪽 어딘가 쯤에 통로가 있을거란 정보는 입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지상 17m 위쪽, 중심선에서 동쪽으로 7.3m 벗어난 곳에서 갱도를 발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1.알 마문이 판 도굴 갱으로 창건때는 석재로 가려져 있었다. 알 마문은 폭약을 이용해 진짜문 밑에 지금의 관광객 들이 지나드는 지금의문을 만들었다. 2.상부에는 합각머리 모양으로 돌이 배치되어 있고, 현재는 철제문으로 봉해져 있다.
이제 마문에게 남은 것은, 보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까지 친절하게 나있는 통로(Descendinf Passage)를 따라 내려가는 일 뿐이었다 . 그런데 그들은 예상밖에 올라가는 통로(Ascending Passage)입구 부분이 발견하게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올라가는 이 통로가 막혀있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를만들 때 통로를 따로 만들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통로를 다시 막아 놓았다.
아무튼 그 통로가 막혀 있었음으로,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최초라는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보물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난당하지 않고 그자리에 그대로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대회랑
또 그들에게는 이 통로가 지구상에 건설된 돌 건축물들중에 가장 크고 가장 무거운 건축물의 상부 3분의 2의 중량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엄청난 무게를 지탱하면서도 길이 46m 경사각 26도의 굴절형 통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약한 석회암 암반을 뚫어 대회랑으로 가는 통로를 만들었고 마침내 보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왕의 방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여왕의 방
없었다 아무것도. . . . 마문 역시 반드시 금은보화가 아니더라도, 옛 고대인들의 높은기술이나 지혜의 책을 기대하였지만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었다고한다.
여왕의 방은 남북길이가 5.68m에 동서 길이가 5.74미터. 천장은 우아한 맞배 구조이고 높이가 6.22m이며 정확하게 피라미드의 동서 축과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왕의 방
이번엔 왕의 방이다. 그러나 왕의 방 역시 미라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영생이나 부할을 바라고 무덤을 만들었다면 적어도 미라정도는 있어야 정상이지 않는가? 그런데 부장품과 미라 모두 없어졌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왜 피라미드 안에 부장품과 미라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세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발견한 방은 외관뿐이고 왕의 묘를 설치한 방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설. 혹은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 도굴이나 이장이 이루어 졌다는 설, 마지막으로 대피라미드는 묘가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리라. 아니 알 수 없었으리라. 그 곳에 진정으로 숨겨져 있는 놀라운 보물들을...
방의 높이는 5.8m, 길이가 10.5m, 그리고 폭이 5.25m로서 2:1의 비율로 이루어진 직육면체 방이다. 바닥에는 열다섯 장의 두터운 화강암판이 깔려 있으며 벽은 100개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이는데, 돌하나의 무게가 70톤 혹은 그 이상으로 5단으로 쌓여져 있다고 한다. 천장은 각각 무게가 50톤 정도 나가는 아홉 장의 화강암판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이 넓은 방은 놀라운 수학적 계산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높이5.8m는 바닥의 대각선 길이11.6m의 절반이라고 한다. 또한 정확히 2:1의 비율을 지닌 직사각형의 방으로1:1.618의 "황금분할"이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흔히 황금비는 기원전 4세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보다 훨씬 이전에 건축된 피라미드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왕의 방은 대피라미드의단 정확히 50번째 단에 위치해 있으며 지상에서 45m 높이에 있다고 하는 점이다. 또한 이단을 수평으로 절단하면 대피라미드 전체 밑변 면적의 꼭 절반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발휘할 수 잇는 최대의 측량술과 수학 그리고 건축술을 왕의 방이라는 공간에 함축시켜 놓았던 것이다.
결국 마문 일행은 도굴을 목적으로 하였기에, 고대인이 남겼던 가장 위대한 유산이자 값진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보물은 거대한 암석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가며 피라미드를 쌓고, 그 피라미드를 통해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고대 이집트 인들의 지혜이다.
통로, 무엇을 위한 공간인가? 첫 번째로 "환기통로"라는 주장. 그러나 환기통로 일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 갱도들 중 일부가 밖깥쪽으로 뚫려있지 않은 이유를 설명 할 수 없다. 또 통로 입구를 석판으로 막음으로써 환기구로써의 기능이 소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빛이나 "별 통로"라는 주장으로 로버트 보발, 그레이엄 핸콕등의 주장이다 . 그러나 왜 통로가일직선이 아니고 굴절되었는가는 설명할 수 없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당시의 별자리를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북극성을 보기 위해 피라미드는 정확히 북위 30도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피라미드의 위치는 북위 29도58분51초
물론 여기에 대해서 북극성에서 발하는 빛이 공간에서 굴절되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약간 뒤에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관찰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근소한 오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를 적용한다면 그 많은 각(角)들을 고려해봤을 때, 100여개 정도의 다른 별과도 부합될 수 있다.
세 번째로 물통로라는 것. 하지만 통로의 입구에서부터 물을 공급받는다 하더라도 돌과 돌사이 틈에 의해 모두 스며들고 말 것이다. 또한 계속해서 물이 스며들면 결국 지반이 침하될 것이고 피라미드가 아무리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정적인 붕괴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네 번째로 에너지통로라는 것. 하지만 이것역시 너무나 막연한 주장이고 논리적인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설로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정신이나 영혼의 통로라는 것. 이것은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심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그러나 쿠푸왕의 피라미드 이전이나 다음에 만들어진 피라미드에는 왜 그러한 종교적인 의식의 통로가 만들어지지 않았을까라는 문제재기에 이렇다할 해답을 내놓지 못하게 된다.
도데체 무엇때문에 통로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왕의 방이나 여왕의 방에는 정말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일까? 이것은 여전히 풀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차라리 다른 피라미드에도 이런 독창적인 구조가 있다면 훨씬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늘에는 별들, 땅위에는 피라미드
갱도와 별자리의 위치 관계
고대 이집트는 여러신을 믿는 다신교이긴 하였지만, 그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은 태양신 '라'였다. 그래서 대피라미드와 별자리가 어떠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 여러차례 제기되었지만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더구나 왜 쿠푸왕의 피라미드에만 그러한 통로가 있냐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해답도 내 놓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태양신 숭배사상에 너무나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태양신말고도 수많은 신에 대한 숭배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취급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오랫동안 대 피라미드 군의 건설에 대한 고증을 어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진보적인 이집트 학자인 웨스트를 포함한 그레이엄 핸콕등은, 이집트 신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오시리스와 이시스 그리고 그의 아들 호루스가 각각 오리온 자리, 큰개자리, 그리고 작은곰자리와 관련 깊다는 주장을 내 놓았다.
그리고 로보트 보발에 의해 대피라미드의 왕과 여왕의 방 통로를 별자리와 관련해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기자지역의 세 피라미드가 오리온자리의 배치와 흡사하다는 것에 주목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피라미드 연구사에 있어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밑의 그림을 보면 갱도들이 가르키는 각도의 하늘에 하늘의 별자리를 보여주고 있다. 왕(오시리스를 상징)의 방 남쪽 통로는 오리온 벨트의 세별중에 알닉탁(제타 오리온)에 정확히 조준되어 있으며 여왕의 방 남쪽 통로는 정확히 큰개 자리의 시리우스 자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중요한 점인 그러한 위치때를 가르키는 역사적 시간은 기원전 2400년~ 2475년 경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바로 대 피라미드 군이 만들어진 시기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 두 개의 통로중 왕의 북쪽 갱도는 용자리의 투반성을 가르키고 있으며, 여왕의 방 북쪽 통로는 작은 곰자리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다만 로버트 보발이나 그레이엄 핸콕등은 자신의 저술에서, 이 피라미드가 오리온 자리 배치도와 100% 일치하지 않는 것은 별의 공전주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계산상으로는1만450년의 별자리와 일치한다 하여, 마치 피라미드가 그 당시 축조되었을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주장
개인적으로 고대 이집트는 단순히 육안으로 밖에는 별자리를 관측할 수 없었기에 다소의 오차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오차를 인정하지 않고 천문학적 계산법에만 의존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으로 보인다.
여기에 편승하여 피라미드는 천문관측소라는 주장을 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피라미드는 천문 관측을 위한 목적으로서의 장소가 아니라, 천문 관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과로서의 장소라는 해석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고대 파라오들이 이 같은 천문관측의 결과물을 지상에 나타내려 한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은 목적이다. 그들만이 하늘에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특수한 신분임을 과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쿠푸왕 이후에는 이러한 통로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미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구조를 반복적으로 만들필요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 만든 공법역시 너무 어렵고 힘드니, 착공을 결정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기자 지구의 3대 대피라미 자체가 쿠푸왕대 수립된 거대한 건설계획의 일부였을 지도 모른다. 천상의 질서를 지상에서 구현하고자 한 강력한 열망과 바램에 의해 착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라미드 하나 하나 만드는 것이 워낙 어려웠기 때문에, 쿠푸왕 때에는 단 1기 밖에 못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대 또 다음대까지 이어지는 대 공역을 통해 그 엄청난 프로잭트가 완성되어 나갔을 것이다. 물론 이상은 개인적인 주장이며, 현지답사나 전문적인 연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설에 불구하다. 따라서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여전히 수많은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는 불멸의 미스테리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