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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왕조 시대 중 왕조 시대 말기 왕조 시대 |
고대 이집트 왕조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 신관이었던 마네트가 저술한 이집트사를 기본바탕으로 한다. 마네트는 기원전 3100년경 최초로 이집트의 고대왕조가 성립하여 파라오가 등장할때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오리엔트 문화권으로 통합되는 기원전 332년까지를 약 30왕조로 구분하여 집필하였으며, 이 30왕조를 다시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로 분류하였다.
여기에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 제 1 중간기가 있었으며,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 제 2 중간기가 있었는데, 이 중간기는 혼란의 시기로 역사적 기록도 불분명하고 이집트 전체를 통일한 왕조도 등장하지 않는 암흑기라 할 수 있다.
기원전 4000년경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 정치, 종교, 문화가 서로 다른 나일 삼각주의 하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이집트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후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하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상이집트의 나르메르(혹은 메네스)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어 수도는 중간지점인 나일 델타 곡창지대가 시작되는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최초의 파라오는, 최초로 이집트를 건설한 나르메르였고, 이것은 상이집트에서 출토된 나르메르의 석판으로도 증명된다.
그러나 이집트사가 워낙 후대에 집필되다보니 고대로 갈수록 내용이 부족한면이 많은데, 초대 파라오 나르메르 이후 제 3왕조가 등장할 때 까지 기록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집트의 고왕조시대라면 제 3왕조 부터 10왕조 까지를 지칭한다.
제3왕조 역시 기록이 매우 빈약하지만 조세르 왕(기원전, 2630~2611년)은 최초의 피라미드 건축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분명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리고 제 4왕조가 되자 스네푸르(기원전, 2575~2551년)에서부터 시작된 피라미드 축조는 쿠프(기원전, 2551~2528년)왕과 카프렌왕을 거치면서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케프렌 피라미드
쿠프의 아들인 케프렌(기원전, 2520~2494년)은 쿠프와 비슷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214.5×214.5m의 바닥 면적에, 높이는 143.5m, 3대 피라미드중 중간에 있는 피라미드. 케프렌의 피라미드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약간 높은 지면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원래 높이는 쿠프의 피라미드보다 3m 낮지만 더 높게 보인다.
미케리노스(기원전, 2494~2472년)는 3대 피라미중 가장 마지막 피라미드를 완공하였다. 바닥 면적은 105×105m, 높이는 65.5m 로 이전왕들이 피라미드보다 훨씬 작은 규모이지만 오리온 성좌와 관련이 깊은 피라미드 군을 완공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제 4왕조가 지방 귀족들의 성장에 밀려 쇄락하면서, 피라미드 규모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한다.
제5왕조 이후
5왕조(기원전, 2471~2323년)나 제6왕조의 파라오들은 규모보다는 장제적인 성격이 강한 소규모 피라믿드를 축조하였다.
여기에 피라미드 축조에 관하여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전측의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피라미드 축조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7왕조부터 10왕조까지 피라미드 축조는 중단되기도 하였다.
제11왕조(기원전2133~1991년)와 제12왕조(기원전 1991~1785년)에 해당되는 중왕국시대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에 의해 제통일되면서 잠시나마 파리미드의 건축이 재개될 수 있었다.
제12왕조의 6명의 왕은 저마다 상당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특히 센우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는 밑변 105m, 높이 61m,로 제 4왕조 못지 않는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그와 같은 규모의 피라미드는 그 이후 두번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중왕조가 전개되는 제13왕조∼제17왕조까지의 혼란기에 4개의 소피라미드가 더해지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제 12왕조 때에 피라미드 건축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 12왕조 이후의 피라미드는 차라리 돌 무지 무덤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리고 기원전 1570년 힉소스 족의 이집트 지배가 150여년 동안 이루어 지면서, 피라미드에 관련된 지식 전수는 중단되었으며 피라미드 왕조는 몰락하고 말았다.
여기에 피라미드 축조에 관하여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전측의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피라미드 축조역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7왕조부터 10왕조까지 피라미드 축조는 중단되기도 하였다.
제12왕조의 6명의 왕은 저마다 상당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특히 센우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는 밑변 105m, 높이 61m,로 제 4왕조 못지 않는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그와 같은 규모의 피라미드는 그 이후 두번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중왕조가 전개되는 제13왕조∼제17왕조까지의 혼란기에 4개의 소피라미드가 더해지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제 12왕조 때에 피라미드 건축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 12왕조 이후의 피라미드는 차라리 돌 무지 무덤에 가까울 정도이다
그리고 기원전 1570년 힉소스 족의 이집트 지배가 150여년 동안 이루어 지면서, 피라미드에 관련된 지식 전수는 중단되었으며 피라미드 왕조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집트 피라미드 왕조의 소멸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제 3왕조 시조인 제세르 (기원전 2645)왕대에 최초로 나타나 제 4왕조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또한 5왕조(기원전, 2471~2323년)나 제6왕조의 피라미드들은 비록 제 4왕조시대에 피해 크기는 작아졌지만, 파라오에 대한 신격화와 장례절차는 보다 강렬해 졌다. 그에따라 제5왕조나 제6왕조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에는 매장실 벽면에 신의 업적을 찬양하고 왕의 저승길 안전을 기도하는 기도경문, 즉 피라미드텍스트를 적어놓기 시작하였다. 즉 제 4왕조의 까지 축조나 신앙의 경건함 자체를 목적으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면, 5왕조와 6왕조로와서는 개인적은 구원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와함께 개인 구원의식은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오직 파라오 한명만을 위한 피라미드 축조의 당위성도 떨어져 갔으며, 그에따라 피라미드 역시 신앙심 자체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서 무덤정도의 역활밖에는 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원래의 목적을 상실해 가던 피라미드는 제7왕조의 이비왕을 마지막으로 일시 모습을 감추게 되는데, 제11왕조에 이르러 다시 한번 나타나게 된다. 제12왕조의 6명의 왕은 저마다 상당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는데, 특히 센우스레트 1세의 피라미드는 밑변 105m, 높이 61m,로 제 4왕조 못지 않는 피라미드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그와 같은 규모의 피라미드는 그 이후 두번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중왕조가 전개되는 제13왕조∼제17왕조까지의 혼란기에 4개의 소피라미드가 더해지기는 하였지만 사실상 제 12왕조 때에 피라미드 건축은 중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 12왕조 이후의 피라미드는 차라리 돌 무지 무덤에 가까울 정도이다 피라미드 왕조의 종말 그렇다면 제 6왕조 이후 왜 이렇게 급격하게 피라미드 건축이 축소되었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제 7왕조부터 10왕조까지 전개된 파라오와 지방 귀족들간의 치열한 세력다툼에 의해서 였을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초대형 피라미드 건축은 고대 이집트의 자발적이며 전국민적 참여가 없이는 불가능한 국가사업이었다. 그런데 귀족과 파라오가 서로 반목하고 권력투쟁을 전개하는 상황속에서는 도저히 대형 피라미드를 축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왕조가 자주 교체되면서, 신전측의 교체도 자주 일어 났을 것이다. 비록 피라미드의 주인공은 파라오였지만, 실질적으로 공사감독하는 것은 신관들로써, 이들은 피라미드에 관한 모든 지식을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피라미드 건축이 복잡하고 어렵게 전개되면 될수록 신전측의 영향력은 증대될 수 밖에없다. 따라서 신전측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서라도 소형 피라미 축조를 선호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왕조와 신전측이 잦은 교체로 인해, 피라미드를 둘러싼 지식의 전수는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몰락의 길을 걷던 피라미드 축조의식은, 기원전 1570년 힉소스 족의 이집트 지배가 150여년 동안 이루어 지면서 피라미드에 관련된 지식 전수는 중단되었으며 피라미드 왕조역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 전체 길이 약 70m, 높이 약 20m, 폭 약 4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는 자연석 그대로 조각한 작품이다 파라오의 권위가 떨어지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피라미드가 조직적으로 약탈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대에 들어서 도굴은 더욱 심해졌고 심지어는 자신이 건설하는 피라미드의 부장품을 확보하기 위하여 파라오가 직접 선대의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도굴되었느냐 아니냐로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도 기원전 2000년 이전에 약탈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폐단을 잘 알고 있는 후대의 파라오들은 그 이후 쿠프의 대피라미드처럼 웅장하게 축조하지 않았다. 피라미드 건설이 쇠퇴한 또 다른 이유는 비실용적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축조에 들어가는 막대한 인력과 재정부담뿐만 아니라 파라오의 미이라를 영구히 보존하는 데도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 따라서 후대의 파라오들은 미이라를 영구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밥법으로 나일강 서쪽 절벽 밑의 바위를 파고 현실을 만들어서 매장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들은 왕가의 무덤이 있다는 어떤 증거도 외부에 남겨놓지 않았다.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왕가의 계곡역시 도굴을 피하지는 못하였지만, 오직 하나 투탕카멘 파라오의 무덤만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체 오늘날까지 전해 질 수 있었다. 또한 피라미드 왕조는 몰락하였지만, 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남아서 그날의 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회의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선 이집트 당국에 막대한 관광수입원이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고대의 강렬한 열정과 신비로운 건축과정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수많은 상상력과 도전의식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외경심을 제공한다. 그것은 결코 허무한 것이 아니다. 상상력과 도전의식이 없다면 과연 오늘날의 문명이 존재하였겠으며 위대한 발견과 발명이 이루어 질 수 있었겠는가? 사막과 초원의 경계선상에서 우뚝 서 있는 이 신비의 미스테리 건축물은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우리들에게 상상력과 도전의식을 제공할 것이다. |
출처 : sun-star
글쓴이 : 크리슈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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